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투안 라부아지에 (문단 편집) == [[징세청부업자]] == 라부아지에는 부친의 의도로 신분 상승을 노려 세금 징수 조합에 가입해서 징세청부업자로 활동했다. 때문에 대중들의 미움을 받았고, 프랑스 대혁명의 공포정치 때 처형되었다. 징세청부업자에 대한 대중적인 혐오는 역사가 깊다. 성경에 등장해서 모든 이들에게 욕먹는 직업 '''[[세리]]'''가 바로 이 징세청부업자이다.[* 당시기 힘들다고 여겨지던 직업 투탑 중 하나였다. 참고로 나머지 하나가 바로 '''[[창녀]]'''였으니, 얼마나 이미지가 안 좋았을지 알 만하다.] [[성경]]에도 언급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기원은 [[고대 로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징세청부업자는 국가에 소속된 징세 공무원이 아니라 민간 업자였다. [[앙시앵 레짐|구체제]] 당시의 징세청부업은 일단 국왕에게 목돈을 빌려준 다음 돈으로 돌려받는 대신 일정 기간 일정 지역의 세금 징수권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세금을 얼마나 거두느냐는 거의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들이 거두는 세금은 국왕 직할지에 비해서 적어도 2배가 넘었다. 라부아지에는 이것으로 어지간한 귀족 못지 않은 고소득을 올렸는데 연수입으로 최대 15만 리브로의 수익을 기록한 적이 있다.[* 이것이 오늘날 화폐가치로 200억원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지만, 프랑스 대혁명 당시 [[아시냐]] 지폐 파동으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행해 화폐가치가 수백분의 일로 떨어졌다. 하지만 당대 최고액의 연금을 상속받은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라파예트 후작]]의 1년 연금소득이 12만 리브로였으니 귀족 못지 않은 수입을 올린 것은 분명하다.] 그가 '''[[돈지랄|다이아몬드를 사서 태워버리는]]'''[* 그냥 [[다이아몬드]]를 태우기만 한 게 아니라, 그걸 위해 거대한 렌즈를 주문하고, 그 렌즈를 지탱하기 위해 [[2층버스]]만한 구조물을 설치해서 다이아몬드를 태워버렸다. 그리고 나서 다이아몬드가 [[탄소]]의 결정체임을 입증했다.] 기행을 펼치거나 개인 실험실을 구입하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근간이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라부아지에는 과학에는 재정적 요소(연구 지원금 등)도 분명히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의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그는 재산을 아낌없이 연구에 썼기에 그는 징세청부업자들 중에 의외로 재산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서민 기준으로는 많은 재산을 모았고 값비싼 기구들로 실험을 하는 행위 자체가 시민들에게는 사치로 비춰졌다. 라부아지에가 특히 많은 미움을 사게 된 것은 그가 파리를 드나드는 통행세를 징수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통행세는 중세 이래 봉건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세금 수입원이었다. 중세 후기에 그 유명한 상파뉴 정기시가 호황을 이루게 된 것은 상파뉴 백작이 통행세를 폐지하자 유럽의 모든 상인들이 상파뉴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상파뉴 백작은 통행세를 걷지 않더라도 지역 산업의 활성화로 세금 수입이 증대될 것이라고 예측했고 그의 예측은 맞아들었다. 그러다가 훗날 상파뉴를 획득한 프랑스 국왕이 여기에 통행세를 다시 부과하자마자 상파뉴 시장은 망했다.] 라부아지에는 통행세 징세활동에 질량 보존의 법칙을 응용하여, [[파리(프랑스)|파리]]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싸고 통행세를 걷으면 확실하게 세금을 걷을 수 있다는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 돈은 (사람들이 단체로 미쳐서 화폐를 태워버리거나 내부에서 새로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소멸하거나 생성되지 않기 때문에 파리를 나가거나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면 파리 내부의 돈의 양은 일정하다. 그러므로 파리로 들어오는 돈의 양이 파리 전체의 수입, 파리에서 빠져나가는 돈의 양이 파리 전체의 지출로 볼 수 있다. 이런 논리는 물리에서 널리 쓰이는 연속방정식(continuity equation)이나 [[가우스 법칙]]과 상통한다. 또한 파리 전체를 감시하는 것보다는 파리 경계만 감시하는 것이 월등히 간편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만 좋은 것이 아니라 실용적이기도 하다. 현대에는 [[외화]]의 [[계좌이체|송금]]을 감시하고 과세하는 데 정확히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이렇게 되면서 통행세 탈세가 사실상 원천 봉쇄되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를 향한 대중들의 분노 또한 높아졌다.[* [[자크 알렉상드르 세사르 샤를|쟈크 샤를]]([[샤를의 법칙]]을 만든 과학자)도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니 [[프랑스 혁명]] 기간에 대중들의 미움을 받고 있던 징세청부업자들이 제일 먼저 처형대에서 [[몰살]]당하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혁명정부는 세금을 거두는 것 자체는 범죄가 아니고 오히려 정부에게 필요한 공무를 대행하는 것이었기에 정말 필요한 액수의 세금만 거둔 것으로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징세청부업자 중에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털어서 먼지가 안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혁명은 갈수록 과격화되어 마침내 자코뱅당이 정권을 잡고 악명높은 공포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혁명재판소에서는 라부아지에의 연수입 15만 리브르 중 10만 리브르, 즉 전체 수입의 2/3가 부당이득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자코뱅당은 '''모든 위법 행위에 대해 사형을 집행'''한다는 방침을 천명했고,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던 1794년 5월 라부아지에는 다른 징세청부업자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당하며 공포정치는 막을 내렸다. 이를 두고 야사에서는 혁명 지도자인 [[장 폴 마라]]가 원래 과학계에 진출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으나 심혈을 기울여 쓴 [[논문]]이 라부아지에에게 까여서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는 루머가 있는데, 마라는 의학 연구자로 라부아지에와 계통이 달랐고 아무리 서슬 퍼런 국민공회 시절이라지만 혁명가의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 한 사람을 처형하는 것은 마라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그리고 징세업자들은 프랑스 민중들의 공적이었고, 라부아지에는 그 중에서도 가장 대중의 눈에 주목받기 쉬운 통행세 징수자로서 '''혁명에 직접적으로 불을 붙였으니''' 목이 잘려서 죽을 이유는 차고도 넘쳤던 셈이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등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재판관 중 수석 재판관인 코피나르는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혁명은 신속한 재판을 원하고 있다!"'''고 말하며 결국 사형선고를 내렸다. 또는 '''"우리에겐 과학자가 필요하지, 탐관오리는 필요없다!"'''라고도 한다. 이쪽이 더 말이 된다는 의견이 있는데, 과학자들 중에서도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고 중용된 인물도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 서술한 몽골피에 형제만 해도 지금은 발명가로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과학을 만든 과학자로서 우대받았고 위에서 언급한 [[자크 알렉상드르 세사르 샤를|자크 사를]]도 혁명이 한창인 1795년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천되어 나중에는 국립공예원(Conservatoire national des arts et métiers, CNAM) 물리학 교수까지 지내는 등 혁명정부에서 상당히 우대받았다. 애초에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 계층은 과학에 호의적이었다. 당시 부르주아 계층 사이에 자리잡은 계몽사상과 자연과학은 상호 간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따라서 부르주아 계층은 자연과학과 친숙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부아지에의 행적은 도저히 눈감고 넘어가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